2017/09/12 01:21

‘다름’을 다루는 영화, <타인의 취향> 영화

* 본 글은 영화 <타인의 취향>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항상 똑같은 사람들하고만 있으면 그들은 우리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해버린다.
그렇게 되고 나면, 그들은 우리 삶을 변화시키려 든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이
바라는대로 바뀌지 않으면 불만스러워 한다. 사람들에겐 인생에 대한 나름의
분명한 기준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현실로 끌어낼
방법이 없는 꿈 속의 여인 같은 것이니 말이다.”
– 파울로 코엘료 <연금술사> 中


최근 한국에서 재개봉한 영화 <플립>의 열기가 뜨겁다. 미국에서 2010년에 개봉한 이래 꼬박 7년이 지나서야 오직 관객들의 요구와 입소문만으로 상륙한 이 영화는 적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3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을 극장으로 불러내는데 성공했다. 작년에는 1995년 개봉작 <러브레터>를 필두로 시작하여 <500일의 썸머>와 <냉정과 열정 사이>가 각각 7년, 13년의 세월을 딛고 메인 극장가로 화려하게 귀환하며 국내 영화팬들의 입방아에 수없이 오르내렸다. 또한 올해 4월 성황리에 재개봉했던 <클로저>도 숱한 이슈를 남겼다.

위 작품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재개봉한 영화라는 점? 로맨스 장르? 둘 다 맞는 말이지만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작품들만이 지닌 특색을 발견할 수 있다. 다름 아닌 바로 남녀의 미묘한 시선 차이를 놀랍도록 세밀하게 풀어냈다는 점이다. 물론 예민한 문제를 다루었으니 각 영화의 플롯에 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다분하지만, 극중 캐릭터들이 실존하는 인물들이라고 해도 믿어질 만큼 입체감 있고 매력적이게 그려졌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쉽게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한 영화가 재개봉한다는 의미는 영화사의 입장에서 성공을 필히 보장한다는 자신감의 표출이다. 영화를 아직 채 관람하지 못한 사람들은 꼭 늦기 전에 극장에 달려가서 즐기게끔 만들고, 이미 관람한 이들도 다시금 찾아보고 싶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1_closer
영화 <클로저> 中
 

시대가 변해도 끊임없이 재조명되고 셀 수 없는 건설적인 뒷이야기를 이끌어내는 작품을 ‘명작’이라 칭한다. 그런 의미에서 ‘남녀의 시선 차이’는 명작을 탄생시키기에 더없이 훌륭한 주제이다. 세대를 막론하고 이 주제만큼 영화의 이야기를 시작부터 끝까지 긴장감 있게 끌고 갈 수 있는 매개체는 찾아보기 힘들다. 명확한 주제 의식을 가진 영화의 좋은 예시로 앞서 거론한 <500일의 썸머>와 <클로저>를 들 수 있는데, 전자는 남자 주인공의 시점에서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과정을 솔직담백하게 묘사하여 네티즌들 사이에서 ‘연애 교과서’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후자의 경우 네 명의 남녀가 각자 경험하는 사랑이 절묘하게 교차하며 각 인물의 심리적 묘사를 지극히 현실적으로 담아낸다. 감독이 작품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명확하게 있더라도, 영리한 감독이라면 자신만의 메시지를 대중에게 이실직고하지는 않을 것이다. 주제 의식은 확고히 갖되, 섣부른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한 장면, 한 장면의 해석을 관객들의 몫으로 맡기며 작품을 예술의 영역으로 인도하는 것이 명감독들의 의도에 가깝다. 작품을 공개한 후, 특정 장면에 있어서 대중들의 의견이 분분하다면 감독은 비로소 회심의 미소를 지을 것이다.

앞서 언급된 작품들이 남녀 간의 시선 차이를 심도 있게 다루었다면, 지금부터 소개할 영화는 남녀뿐만 아니라, 보다 다양한 인물들 간의 얽히고 설킨 상황들을 관객들에게 쉴 틈 없이 던져준다. 이 작품이 명작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가름은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려 한다.


2_TOO-1
“그녀를 바라보면 내 마음은 따뜻해지네.”
 

마누라에게 무시당하기 일쑤고, 부하 직원에게도 구박받는 중소기업 사장 까스텔라를 중심으로 여섯 명의 각기 다른 인물들이 영화 <타인의 취향>(1999)을 빛낸다. 따분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까스텔라는 우연한 계기로 지루하기 짝이 없는 연극 한 편을 보다가 문득 주연배우 끌라라의 연기에 매료되고 만다. 끌라라는 알고 보니 까스텔라가 얼마 전 소개받은 개인 영어교사였다. 마음을 한순간에 뺏긴 까스텔라는 끌라라의 환심을 사기 위해 연극을 반복해서 관람하고, 그림을 보러 다니고, 영어로 시를 쓰는 등 자신이 평생 문외한으로 지내왔던 예술 세계에 발을 들이지만 사람이 그렇게 쉽게 바뀔 리 없다. 사랑에 의해 그는 분명 자신의 삶을 대하는 태도에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변화를 겪지만 끌라라의 마음을 얻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뿐이다.


3_TOO-2
“배우? 이름이 뭐죠?”
 

끌라라는 남들이 보기에 연극 배우로서 모든 걸 성취한 베테랑 커리어 우먼처럼 보이지만, 본인 입장에서는 나이 불혹에, 후배들에게 곧 자리를 내줘야 하는 이른바 ‘저물어가는’ 여배우다. 결혼도 아직 못했는데 곧 아이도 낳을 수 없게 될 거라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 친구인 마니가 그녀에게 남자를 소개해준다며 거들어도 그녀는 한사코 거절하며 자신은 순수한 사랑을 꿈꾼다 한다. 왠지 그녀의 눈이 높아질 대로 높아진 건 아닐지 의심스럽다.


4_TOO-3
“헤이즐넛. 아몬드랑 같다고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아.”
 

끌라라의 친구 마니는 바텐더로 일하며 부업으로 집에서 마약을 판매하는 여자다. 그녀는 십 년 전에 한 침대에 있었던 까스텔라의 운전사 브루노를 한 눈에 알아보고 그에게 다가간다. 하지만 그녀는 순진해빠진 브루노보다 그의 동료이자 보디가드인 프랑크와 사랑에 빠진다. 바람기 가득한 프랑크도 쿨해 보이는 마니에게 깊은 끌림을 느낀다. 하지만 프랑크는 직업정신에 있어서 본인이 떳떳하다고 굳게 믿기 때문에 마니가 불법으로 돈을 버는 행위를 이해하지 못한다. 얼핏 보면 사소해보일 수 있는 생각의 차이가 그들에겐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지켜볼 일이다.


5_TOO-4
“왜 그렇게 이해를 못해요? 다 아가씨를 위해서예요.”
 

까스텔라의 부인 앙젤리끄는 인간들의 모든 행동이 경박하다고 생각하며 특히 남편이 크림케이크, 초콜릿, 술 등 단걸 먹으려할 때마다 살찐다며 핀잔을 준다. 본인 딴에는 남편의 건강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남편 입장에서는 날마다 끊이질 않는 잔소리 같다. 또,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그녀의 강아지가 지나가는 행인을 물어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하며 오히려 역정을 낸다. 까스텔라가 여동생에게 새 집을 구해다줬을 때, 극구 사양하는 여동생의 의견을 ‘싸구려 취향’이라 무시하면서까지 본인이 인테리어 전문가라며 마음대로 꾸미기를 감행한다. 실상은 업계에서 알아주지 않아 할 일이 없는 백조인데 말이다.

이처럼 <타인의 취향> 속 인물들은 매사에 조금씩 충돌하며 이견을 보인다. 하지만 이들의 충돌은 여느 블록버스터에서 다루는 커다란 사건사고를 동반하지 않는다. 그저 일상에서 일어날 법한 자잘한 해프닝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각 인물의 인격적 성장에 이바지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 마니를 연기하기도 한 아녜스 자우이 감독은 이러한 현실적인 설정을 바탕으로 ‘모든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다. 하지만 특정 장면을 바라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어느 한 방향으로 생각하게끔 의도적으로 유도하는 것을 기피한다. 한 장면, 한 장면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주옥같으며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한다. 제각기 다른 배경에서 다른 것을 보고 느끼며 살아온 사람들이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 모여 소통을 한다는 것 자체가 기적처럼 느껴진다.

영화는 비단 처음부터 끝까지 의견이 충돌하는 모습만 내내 비추지는 않는다. 보는 사람이 다 애가 탈 만큼 숨 막히는 상황들이 이어지다가도 이따금씩 인물들 간의 화합을 일궈내는 장면들은 답답한 마음을 뻥 뚫어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특히 영화 중간, 중간에 불안정한 플루트 연주 실력으로 듣는 사람의 마음을 조아리게 했던 브루노가 마침내 얼굴도 모르는 타인들과의 앙상블을 만들어내는 시퀀스가 압권이다. 마치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의 천신만고 끝 가슴 설레는 첼로 연주 장면을 보는 듯하다.


6_BCP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 中
 

필자는 ‘역지사지’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같은 것을 보고도 생각이 엇갈릴 때, 한 걸음 물러서서 상대방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고자 노력해 보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다. 개개인의 인생도 영화 <타인의 취향>처럼 해석할 겨를 없이 숨 가쁘게 돌아가지만, 조금의 여유를 갖고 뒤를 돌아보면 찰나의 순간에 내렸던 결론과는 다른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화라는 매체는 우리네 삶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이다. 잘 만든 영화들은 수많은 화두거리를 던져주고, 나아가 자연스러운 대화를 이끌어낸다. 우리는 이를 통해 서로의 깊고 오랜 생각을 엿들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부여받는다.


2017.09.12


덧글

댓글 입력 영역


통계 위젯 (화이트)

00
64
41909